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은 오랫동안 경제적 경쟁력 확보의 수단으로만 다뤄져 왔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 비율을 늘리기 위한 정부 정책과 재벌들의 경영진 성평등 약속도 이러한 관점을 기반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다양성이 지닌 본질적 가치보다 경제적 효용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그 한계가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경쟁력이라는 프레임의 편협함
다양성을 경제적 경쟁력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은 한국 사회 내에서 다양성 정책이 채택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이는 특히 정부 주도의 정책에서 두드러지는데, 여성 과학인 육성 정책, 기업내 여성 관리자 확대 등을 통해 글로벌 경쟁에 대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분명 일정 부분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여성의 참여율 증가, 제도적인 개선 등이 그 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경제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기준에 갇혀 다양성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양성은 단지 기업의 이윤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포용성과 정의 실현을 위한 가치이기도 하다. 경쟁력이라는 단어는 다양성을 수단화하며, 구조적 불평등이나 차별 문제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킨다. ‘이 정책이 수익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나?’라는 질문만이 반복될 때, 정작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외면된다.
또한 ‘경쟁력이 있는 다양성’만 인정받는 구조는 노동시장 내 차별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 단순히 통계 수치나 마케팅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처럼 경제 논리 안에 다양성을 고정할 경우, 다양성을 실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한계를 지니게 되며, 넓은 의미의 사회적 통합이나 인권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가 배제될 수 있다.
정책 중심 다양성의 형식화
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별, 연령,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다양한 인재를 확보하고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사업, 공공기관의 여성 임원 할당제 등이 해당된다. 이러한 노력은 표면적으로는 진보적인 움직임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정책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이 있다. 공공기관에서 여성을 일정 비율 이상 임명하는 것이 목표가 되면서 해당 직위에 요구되는 역량이나 조직문화의 변화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이는 다양성을 실현했다기보다, 단순한 수치 달성에 그친 정책에 불과하게 만든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양성 정책이 정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쟁력 확보를 명분 삼아 다양성을 주장하는 정책은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고, 진정성 있는 포용보다 구호에 가까운 행동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특히 구조적인 성차별, 학력 차별, 지역 차별을 완화하기 위한 장기적 전략보다는 단기적인 실적 중심의 접근이 많다는 점이 문제다.
이처럼 정책 중심의 다양성 전략은 본질적인 구조 개선보다는 제도적 완장을 달아주는 수준에 멈출 가능성이 크다. 다양성이 진정 의미를 가지려면, 단지 정책의 수단이 아니라 조직 문화와 사회적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재벌 중심 약속의 실효성 부족
대기업과 재벌 그룹들 역시 다양성을 ‘기업 이미지 제고’와 ‘해외 투자자 유치’를 위한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른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의 일환으로 다양성은 중요 키워드가 되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을 확대하고, 채용에서의 차별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공식 문서에 담는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적 다양성은 현실에서 기대만큼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기업 내에서 여성 임원이 증가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중요 의사결정 구조에는 남성 중심의 구도가 고착화되어 있으며, 단순히 ‘외형적 다양성’만 채우는 데 그친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 내부에서 다양성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되고 있는지다. 다양성을 수치로만 관리하고, 성과 지표로 환산하면 실질적인 사회적 포용과는 먼 이상론이 된다. 재벌 중심의 선언은 종종 기업 책임 회피의 도구로 전환되기도 하며,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슬로건 아래 사회적 비판을 피하려는 전략이 되기도 한다.
또한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에는 적용되지 않는 재벌 중심의 다양성 프레임은 한국 사회 전체 다양성을 이루는 데 있어 사각지대를 만든다. 즉, 소수의 대기업이 전체 다양성 담론을 주도하게 되면 그 외부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 조직, 커뮤니티는 논의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다양성을 경제적 수단으로 해석하는 담론은 정책과 기업 행보 전반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만큼 단순한 경쟁력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다음 단계로는 다양성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반영하는 사회적 문화와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다양성을 단지 ‘이익 추구의 수단’이나 ‘이미지 개선 도구’로 이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존엄성과 평등권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진정한 다양성 사회로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 중심 시각을 넘어서려는 학계, 시민사회,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동시에 교육 현장과 지역 공동체에서도 다양성의 본질을 가르치고 실천할 수 있는 조건 마련이 요구된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때, 비로소 다양성은 사회의 경쟁력을 넘어 희망의 기반이 될 수 있다.